2013/08/24

타카오산(高尾山)

도쿄에서 가장 가기쉬우며, 덕분에 정상에서 도쿄를 바라볼 수 있는 산.
이곳을 다녀온 것도....
와, 벌써 거의 2 달 전이구나!


시부야, 라이브 클럽 - 그리고 내 소비습관의 변천사를 생각하다.

저번 주말,
나는 처음으로 일본의 라이브 클럽에 가봤다.
한 빅밴드 공연이 있음을 우연히 알게되었는데,
빅밴드라면, 잘 모르더라도 무난하게 괜찮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
서스럼없이 표를 끊을 수 있었다.
모처럼 기분을 내어 하이힐을 신고,
홀홀단신 사람많기로 유명한 시부야를 찾아갔다.

공연을 기다리면서- 어두운 조명에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라이브 공연물에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어떤 연유였던가?
내가 그런 여유를 언제부터 생각했었을까?
빡빡함이 시간 뿐 아니라, 금전적인 부분에서 다분 나왔기에
사실, 이런 나를 10년 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했었던 것 같다.

학생인 시절,
나는 그래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여러가지 아르바이트를 해봤던 것 같다.
수학/과학 과외, 대학 도서관 서가정리,
백과사전 과학파트 요약 및 오류 정정,
학교앞 우동집 서빙,
멀티플렉스내의 고급 중국집 서빙,
대학 박물관 내 설문조사, 등
주말 혹은 학교 수업 짬짬이 할 수 있는 일들만 고르다보니,
그렇게 수입이 좋은 것은 아니였다.
다만, 부모님께서 등록금과 방 값을 대주신 덕분에 사실 알바에 그렇게 목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지.
거기에 대학 4년간, 절반은 장학금을 받고, 대학원에서는 연구비가 나와서,
나름 공부했다는 티를 낼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땅히 큰 용돈이 따로 없었기에 알바는 목매지는 않았다고 해도, 없어서는 안되는 수입원이였다.
적은 알바비를 많이 아껴서 모은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고 싶어하던 일들을 할 수 있었으니까.

허나, 한정된 수입원으로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첫 번째로 내가 '사치'로 치부한 것은 2000원 이상의 끼니였다. 나에게 학관의 저렴한 밥은 단골메뉴였다.
가끔 누군가가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하면, 사실 나에게 그건 맛이 아니였다.
눈물을 머금으며 '아, 이렇게 비싼 것을...'이라며 돈내며 아쉬워하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학관 커피마져도 사치였다. 자판기 커피로 그게  몇 잔인가!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맛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보니,
점차 수긍해야 함을 깨닳았다.
혼자서는 절대 가지 않던 프랜차이즈 커피점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이 돈이면..'이라고 눈물나게 아쉬워하면서 삼계탕집이나 이탈리아 식당에 가고,
'안주 많이 먹지 마라' 주문을 걸면서 술집에 갔다.
덕분에 '맛있는' 것이 점차 어떤 것인지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양한 요리법, 풍부한 식재료, 새로운 식감...
이 새로운 한 문화의 부분에 폭발적으로 관심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은 내 독일 유학생활중에서였다. 경제적인 지원이 소비에 대한 걱정을 크게 덜어주었을 뿐 아니라, 환경적인 요소도 많았다.
슈퍼와 시장에서 보이는 새로운 것들을 써먹어봤고,
다른 나라의 친구들이 맛보여주던 '맛있는' 것들이나, 본토 요리사가 만들던 향토음식들은
한국에서 비싸게 주고 사던 '맛있는' 것들보다도 훨씬 큰 충격이면서 저렴하게 '맛있는'것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사실 지금도 비싼 식당에 가는 것 보다, 그 돈으로 내가 맛있는 것을 해 먹는 것을 선호한다.
왠만한 식당보다 내가 만든 것이 맛있을 뿐더러, 새로운 요리법을 써먹어보는 재미를 알아버렸다.
무엇보다도 식당보다 싸게 먹히면서, 내가 좋은 재료를 고를 선택권을 갖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에게 '사치'라고 생각했던 것은 공연물이였다.
문화생활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에게 한 번 쯤은... 가고 싶어하던 것들이 '공연'이였다.
그러나, 티켓 한 장이 수만원을 호가하던 공연물은 그림의 떡이였다.
어쩔수없이 내가 많이 좋아하던 문화생활은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한정되어졌다.
천 원 이하의 티켓에 흠껏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길 수 있다는 즐거움은, 사실 이것이 꼭 어쩔수없이 한정되기보다도, 내 취향에 맞았기 때문일 것 같다.
내 템포를 내가 만들 수 있다는 선택감이 무척 마음에 들었으니까.
나에게 공연물은 가보고 싶지만, 돈의 괴리감에 '머나 먼' 것이였다.
헌데 내가 친구를 참 잘 뒀었던 것 같다.
공연물에 많은 관심이 있던 나의 고등학교 친구는 삶에 재치가 있었다.
돈 내지 않더라도, '시간'을 투자해서 당첨되게 만들면 된다는 것을 내게 알려줬던 것이다.
종종, 아니, 자주,  '공짜 티켓 생겼어~! 같이 보러가자!'라고 나를 불러주던 그 친구에게
나는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이렇게 좋은 공연들이 있구나! - 연극이며, 음악이며...
무대에 땀을 떨구는 연기자의 모습을 바로 앞에서 보는 감동이나,
기타의 선율이나 북의 울림은 집에서 듣던 스피커의 소리와 다른 레벨의 것들이였다.
물론, 오픈에어에 음악이 하나도 안들리던 엉터리 음악회는 실제 티켓은 10만원이 넘는 것이여서, 티켓 가격이 꼭 공연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란 것도 깨닳기도 했고,
부작용으로 공짜에 목메는 현상이 생겨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좋은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기회들이 덕분에 생긴 거였다.
EBS의 음악공연은 아무래도 가장 최고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작은 무대인데, 음악 시설이 매우 좋을 뿐 아니라, 초청되는 음악인들의 그것은 가히... 이것이 공짜 공연임에 무한히 감사할 정도였다.
이렇게 나는 친구를 통해서 다양한 공연문화를 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점차 내가 알아서 찾아다니던 한 때.
이제는 그것을 그리워하며,
다른 나라에서도 한 번 시도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도 분명... 정말 좋은 공연이 있을 텐데!라는 기대감?
물론, 전혀 알지 못해서 아무래도 복불복이 될 확률이 높긴해도 말이지. - 실패 여러번 해봤다. -_- (독일에서)

소비에서 중요시 여기는 것이 변한다는 것-
그것은 생활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음을 직접 보여주는 일례일 것이다.

....
어쨌든,
저번 주말은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전혀 사전 정보없이 (밴드며, 공연장소며 아는 것 하나 없이) 찾아갔던 것인데,
심각한 재즈 공연은 아니였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던 유쾌한 공연이였다.앞으로 더 도전해 볼 의욕이 생기는 구나.

2013/08/07

Kiso valley (키소 계곡) - 2

그리고, 오늘도 이어지는 키소 계곡의 행로..
이 날은 추마고(tsumago)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인 나기소(Nagiso)에 걸어가서,
그곳에서 약 1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가면 도착할 수 있는 키소후쿠시마(kisofukushima - 익히 알고 있는 후쿠시마와 똑같은 발음이라 흠짓 했었다)에 가서 하루 묵는 일정이였다.

우선, 여관에서의 아침식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식사는 저녁때보다 간소하다. 어차피 밥을 많이 먹지 않다보니, 상관없었다만..)

그리고 체크아웃을 한 뒤, 추마고 마을 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커피가 그리워진 나는 전 날 봤었던 마을의 카페에 들어가봤다.)

(운치 있는 거리의 소담한 카페에서,
작고 특이한 디자인의 일본 커피 잔에
나는 드립 커피 한 잔의 작은 사치를 누렸다.)

(나무가 결국 지붕을 밀어내진 못한 듯.)

(뙤약볕에 쌀을 말리는 모습은 우리나라의 농촌 풍경을 기억나게 했다.)

(지나던 길에 본, 상냥한 고양이.
그러나 털이 심각하게 많이 날려서, 날 많이 심란하게 만들었구나.)

(뭔가를 비교하던 두 꼬마)


나는  추마고 마을 내에 있는 두 채의 문화재 보호 건물 (고위 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숙소들이였다)과 마을 박물관을 둘러봤다.
한 안내원이 유창한 영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자세히 해주셔서 나는 무척 재미있게 이야기들을 들어볼 수 있었네~ ㅎㅎㅎ

우선, 첫번째 보호건물은 다이묘라고 불리는 일본의 영주들이 지나는 길에 머물던 숙소로 쓰이던 건물이였다.
역시, 권력!
이 건물의 규모나 시설은 지금껏 마을 내의 다른 작은 건물들의 3-4배는 족히 넘어 보였다.
다른 마을 내의 건물들이 워낙 소박하다보니,
덕분에 이 건물의 마당, 정원, 연못, 복도, 거기에 화장실까지..'부유한' 건물로서 더욱 돋보이게 되었던 것도 있는 듯 싶어지기도 했다.


(이걸 보니, 최근들어 문인화에 심취하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엄마가 그려준 문인화를 저렇게 만들어서 나도 걸어놔야지.)


건물 내에는 이렇게 불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이 두 개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한 여름에도 불을 피운다고 했다.
사실, 처음 건물에 들어서면서 자욱한 연기에 좀 놀랐었고, 왜 이렇게 연기가 가득하도록 놔둔 것인지 의아했는데,
이후, 들은 바에 따르면, 이렇게 연기를 피움으로서 목조건물에 생기는 벌레들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오호라. 목조건물과 과도할 정도로 높은 습도의 기후라는 최악의 조합을 해결하기위한 방법이였다. 문제라면 이 연기가 벌레를 예방하기는 해도, 온 집안에 그을음을 남긴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주부는 집안을 매일 벽까지도 걸레질을 해야했다고 한다(!). 오늘날 박물관으로 보존되면서도 이 일을 매일 계속 된다고 한다.

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키 작은 사람의 손이 닿는 높이까지 벽이 반들반들 윤이 나고, 그 위의 높이로는 그을린 자욱이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 주부(이제는 관리인)의 키+팔길이라 할 수 있구나~





그리고 나는 다음의 보존 건물을 찾아갔다.
이 건물 역시 다이묘를 위한 숙소였으나, 제 2 숙소 정도로서, 앞서 방문한 건물이 상위 다이묘에게 이미 쓰이고 있으면, 같은 날 추마고에 머물게 된 하위 다이묘는, 조금 작은 규모의 제2숙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나 두 다이묘의 일정이 겹칠일이 거의 없다보니, 이 작은 다이묘를 위한 숙소는 거의 쓰이지 않았고, 지원조차도 마땅히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의 주인은 이 집에서 양조를 해서 부를 축적했다고 하니,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양조를 통해 부를 축적해서,
집안의 목조부분을 가장 비싼 나무자재로 바꿀수도 있었고,
근대 즈음에는 일왕까지도 '30분' 쉬어 간 뒤로, 일왕이 잠시 사용한 서양식 테이블은 집안의 가보가 되었다고 한다.


(일왕의 방문을 위해, 한 번도 본 적 없는 '서양식' 테이블을 만들기 위해
이 집의 주인은 많은 고심을 했다고 한다.
당시, 일왕은 서양식 제복에 자신의 서양식 의자를 갖고 여행을 했기에,
집 주인은 의자 없이 테이블만 만들어야 했다.
당시, 주인은 못머리를 치는 행위가 일본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일왕을 치는 무엄한 행위로 간주했고, 못없이 조립식으로 테이블을 만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 사진의 테이블이 바로 이 집안의 가보가 된 테이블이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불자리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불자리가 다다미와 마룻바닥이 이어지는 위치에 놓이면서
절반은 다다미, 절반은 마룻바닥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다다미 파트를 보자.
여기에서 가장 불을 잘 쬘 수 있으면서 연기가 적게 오는 자리는 가장의 자리였고,
가장의 자리 옆에 최고는 아니다만, 두번째로 안락한 자리는 시어머니의 자리였고,
시어머니의 맞은편이자, 가장의 다른 옆자리는 보통 손님의 자리였다.
그리고 마룻바닥 파트에서 시어머니의 옆자리는 며느리의 자리였고,
가장 불과 멀어서 춥고, 연기가 많이 가고, 바닥도 딱딱한 곳은 아이들의 자리였다.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모습이면서,
아이들을 엄격하게 다루어야한다는 생활 습관이 그대로 보여지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들은 이야기로는 일본에서는 현재 아이들에게 겨울에 반바지를 입힌다고 한다.
인내심을 키운다는 취지라는데,
아무래도 역사적으로도 이어져오는 관습이 아닐까 싶어진다.

박물관은 영어설명문(!)이 적혀있어서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배울 수 있어서 유익했지.
그리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버렸다.

(점심으로 이 지역 특산물인 소바와 간장소스를 발라 구운 떡꼬치를 먹었다.
전 날과 같이 특별한 맛보다는,
산 음식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식사였던 듯..)

이렇게 점심을 마친 뒤,
나는 가장 가까운 나기소(Nagiso) 기차역으로 걸어가서
기차를 타고 키소후쿠시마(Kisofukushima)에 갔다.


(추마고 전경. 작은 마을..
이렇게 보니, 계곡과 어우러져 보기 좋았다.)


(성 유적이라고해서 와봤는데,
유적지라 하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 그래도 이렇게 산 꼭대기에서 마을 전경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 어딘가!)


이렇게, 기차를 타고 도착한 키소후쿠시마는
지금까지의 작은 역참마을에 비해 '도시'다운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만-
아름다운 도시라기보다는 전형적인 과도기적인 콘크리트 도시의 모습이였다.

한 거리가 옛날 모습으로 복원되어있었다만-
지금껏 추마고와 마고메를 보고 왔더니,
옛 모습을 그저 흉내낸 듯 보일 뿐이라, 흥미롭지는 않았고-
오히려 계곡의 물살과 오랜만에 보는 도시적인 불빛이 내 관심을 끌었다.


(마지막 사진들은 제비집! 새끼들이 꽤 자라있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쉽게 지나다니는 1층 처마에 저렇게 둥지를 마련하다니..)

내가 이번에 3일로 다녀온 이 곳은
일본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인 모양이였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편의점이 하나도 안보이는 도시에 머물러봤다는 사실에 나도 깜짝 놀랐으니까.
(그나마 큰 편인 키소후쿠시마에서도 편의점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하나도 못찾았다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놀라움이였다 -0-)
내가 사는 곳은 블럭마다 편의점이 있던데, 이런 곳도 일본에 있었구나!
덕분에 풍경이며, 산세며, 사람들의 사는 모습하며..
여러모로 나에게 만족스러운 여행길이 되었던 것 같다.

대전 생활 1년

14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2022년 6월부터 대전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대전에 도착한 한 달 동안은 마치 한국어를 사용하는 어떤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였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벌써 1.5년이 지났다. 아직도 나는 대전이 낯설다. 이 낯설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