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0

내 2017년을 위한 생각

무거운 눈커풀을 뜨며 오늘은 짜증이 울컥 솟아오른다.
왜 굳이 삿포로까지 가서 반나절 회의를 하고 와야 하는 건지.
의미를 알지 못하는 팀 회식에 참여해야 하는 건지.
피곤을 무릅쓰고 왜 내가 일을 함께 할지 안 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하는건지.
내가 참여할지 안할지도 모르는 계획을 이야기하는 것에 왜 굳이 내가 참여하고 있는 건지.

이 짜증에 대해 늦은 아침식사를 하며, 그리고 이 글을 적으며 생각을 해본다.
나는 내가 왜 짜증을 내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듯 싶다.

나는 지금 당장
무엇이 할 만 한 것이고,
무엇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인지 헷갈려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올해,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이자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열심히 하면, 팀원이라고 생각하며 노력하면, 언젠가 팀에 합류 될 것이라고 믿었오며 일하던 때.
팀 리더의 발언을 들었다. 내가 주요 팀원에 속하지 않는다는 - !
그 말은 큰 상처가 되었고, 일본에 내 미래는 없으니, 일본을 떠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후에, 팀 리더는 정정하긴 했지만, 이미 그의 생각을 들어버렸으니..)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이제 떠날 준비를 하려고 하니까,
기기 팀이나 다른 팀원들에서는 내가 주요 팀원으로 대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대해 내가 느끼는 것은  아쉬움인지 안도감인지, 정체불명의 기분이다.

나는 단칼에 말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5년이라는 시간을 내가 여기서 보낸 것은 나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내가 포기하고 여기서 일하는만큼, 나는 그에 대한 보상이 있을 꺼라고 믿었던 듯 싶다.
그래서 기꺼이 일했고, 새로운 것을 익혀나갔다. 그런데 그만한 보상이 없는 것 같다는 깨닳음은 사실 팀과 관련된 일들에 흥미를 급속도로 잃게 만들었다.

아니, 이거...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는데...?!?!
석사과정동안, 왕복 1시간 30분을 들여 '대기화학'수업을 들으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당시 내가 풀고 싶어하는 문제 때문에 들었던 학점교류가 가능한 다른 대학의 수업이였다. 풀고 싶다는 의지 덕분에 그 수업에 흠취해서 당담교수님을 놀래킬 정도로 좋은 중간고사 성적을 받았었다. 그러나 중간고사 이후, 나는 연구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었고, 대기화학은 나에게 필요없는 과목이 되어버렸다. 관심은 급격히 사라져서, 나는 기말고사 공부는 커녕, 시험결과를 확인하러 가지도 않았었다 (? 기억도 안난다).

그 당시에는 '시간 아낀다'는 속시원함을 느꼈는데, 그 후, 나는... 아쉬움으로 그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충분히 잘 할 수 있었던 과목을,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그냥 흘려버렸던 것이었고, 마지막 마무리를 잘 못했다는 아쉬움을 10년이 지난 지금도 갖고 있는 것이다.

아하!
더이상 일본에서 일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마지막을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하면,
나는 분명히 남은 인생을 아쉬워 할 것이 분명하다.

나를 생각해보건데,
짜증나는 이유는 '필요가 없는데 일해야만 한다는 기분'때문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로인해 마무리를 잘못하면, 나는 평생 아쉬워할 기억을 하나 추가하는 셈이 될 것이다.

내가 기쁘할 것이 무엇인지- 그것 역시 분명히 안다.
- 나를 팀원으로 생각하는 소수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주고 싶다.
- 내가 하던 일을 잘 마치고 싶다.
- 여기서의 이들을 나중에 우연히 만나면, 부끄러움없이 반갑게 인사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 이순간 짜증에 꾸겨져 있을 시간이 없다.
진행해서,
마무리하고,
그리고 홀가분하게- 미련없이 떠나는 거다.

 2017년 목표가 새롭게 정정되는 순간이다.

2017/07/14

음악 영화에서 광기를 보다...! - The Whiplash (스포)

맙소사. 액션영화에서도 이렇게 강렬한 긴장감을 느끼긴 힘들 것 같다. 영화는 쉬지않고 주인공인 앤드류를 마구 후려치는 듯 싶다.

'대가大家'가 되기 위해 네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라고 쉬지 않고 대답을 재촉한다.

자기자신...?
연인...?
심지어는 가족까지...
하나씩 가지를 쳐내듯, 포기하며 앤드류는 자신이 열망하는 '대가'에 다가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음악가의 길이 정말 실제로 있을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음악 문외한인 나로서는 전혀 짐작가지 않는다.

다만, 영화는 처절하게 보여줄 뿐이다 - 기록에 남을만큼 비범한 재즈연주자가 되기를, 혹은 만들어내기를 꿈꾸는 앤드류와 플래쳐가 얼마나 가혹한지.
멋진 리듬이다!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음향효과는 그 때문에 더욱 관객의 마음이 휘몰아치게 만든다. 저 리듬을 만들기 위해, 연주자는 저렇게까지 자신을 몰아치며 연습을 한 것임을 영상으로 보여주니 말이다.

처음 단순하게 보았을 때에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갈등은 크게 한 가지인 듯 보여졌었다.
19세, 희망에 가득차있던 어린 앤드류와 그의 음악선생인 플래쳐 사이의 갈등말이다. 플래쳐의 터무니없는 호통들이 전혀 현실감없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러나 영화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사실 영화 중심부에 놓여있는 갈등은 앤드류 본인의 내적인 갈등이란 점이다. 최고가 되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었고, 완벽을 위해 자신을 던져버릴 수 있는 앤드류였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자신이 지양하는 바를 위해, 자신이 먼저 고백한 여인을 차버리고, 교통사고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대회장을 달려간다. 자신이 획득한 것이고, 자신이 노력한 것음을 보여내고 싶은 열망에 휩싸여가는 것이다! 그러나 플래쳐는 그것을 번번히 꺽어버린다. 마치, 그것이 다가 아니야! 이 멍청아! 네가 보여줄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광기"를 보여봐라!라고 하는 것 같다.

어쩌면 플래쳐는 마치 한 인물이 아니라, 앤드류가 겪을 수 있는 모든 사회적인 장애물의 응축물 같기도 하다. 언제든, 네 대역은 존재한다는 듯, 바로 다른 드러머를 데려오고, 일부러 편하게 가족사를 물어보곤 그 약점을 두고두고 악담에 사용한다. 개인적인 이유는 어떻든 상관하지 않는다. 대회장의 활약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는 선생이 아니라, 바로 앤드류가 겪게 되는 '사회' 자체처럼 보여진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마지막 연주회에서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타난다. 플래쳐, 그는 앤드류에게 일부러 다른 곡을 알려주곤, 앤드류가 처철하게 공연을 망치게 만드는 것이였다! 부드럽게 꼬득이던 얼굴은 이미 사라져버렸다. 무대위에서 홀로 (빅밴드지만, 다른 연주자들이 앤드류를 공연중에 도와줄 수 없는 일이다) 단 몇 분 만에 관객들 앞에서 무너지게 만든다. 앤드류의 멘탈도 인간인지라- 그는 무대를 떠나 아버지의 품에 안겨버리지만, 음악의 광기가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곧바로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자신에게 그토록 악의적인 창피를 안겨준 플래쳐가 서있는 무대의 드럼에 돌아가 플래쳐의 사인없이 자신의 '엄청나게 좋은 연주'하나로 빅밴드 전체를 리드해버린다. "I'll kill you"라며 플래쳐를 도리어 내치는 앤드류. 드디어 영화는 자신의 광기를 발산해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는 앤드류를 보여준다. 영화는 이것이 플래쳐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대답하지는 않지만, 내가 보는 플래쳐는, 다분히 앤드류에 대한 시험을 낸 것이나 마찬가지 였던 것 같다. 여기서 네가 포기하면- 너는 쓰레기다. 나에게 네가 대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봐!라는 듯 하니까. 프래쳐가 마침내 앤드류의 연주에 대답하는 듯한 제스쳐와 표정을 보여주는 것은, 앤드류가 그가 생각한 연주자가 될 가능성을 인정하는 듯 싶어진다. 플래쳐는 그가 "지도"할 연주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남을 연주를 할 수 있는 광기어린 연주자를 찾고 있었으니.....

과연 앤드류의 삶이 행복할까-에 대해서는 다분 많은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앤드류의 미래가 어떨지는 전혀 알 수 없으니까. 플래쳐의 인정은 곧 더 많은 시험을 의미할지도 모르고, 많은 대가들이 그렇듯, 그의 앨범은 남겠지만, 개인사는 불행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을 앤드류가 마다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앤드류의 아버지가 보여주던 표정도 의미심장하다. 감탄이 아니라-, 탄식을 하는 듯한 그 표정은 앤드류의 광기를 아버지도 느낄 수 있는 정도에 다다르고 말았음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이 더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광기.
더불어서, 보여내고자 하는 열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가가 되기 위한 광기말이다.

2017/06/02

우선 순위

작가라면, 유명해지기 위해 글을 쓸 것이 아니라, 명작을 남기기 위해 글을 써야 한다는 말은 사실 작가만을 위한 말이 아닌 듯 싶다.

연구자라면, 유명해지기 위해 논문을 쓸 것이 아니라, 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논문을 써야 한다.

무엇이 "우선"인지 명확히 하는 거다.

2017/02/19

Countdown to zero, 2010 (핵무기 다큐멘터리 영화)

2010년 제작이니, 좀 오래된 다큐멘터리 영화인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핵무기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업데이트가 안되어서;;
꽤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영화였다.

핵무기를 국가의 힘을 과시하는 무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테러단체들이 핵무기를 자체 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높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실제로 어떻게 가능할지 각 재료들을 어떻게 살 수 있고, 운반할 수 있는지, 시나리오를 제시하니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핵무기 충돌이 의도된 것보다도 얼마나 '실수'에 유약할 수 있는지를 수치와 실제 사건들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깜짝 놀란 것은 과거 미국에서 과학탐사목적으로 발사한 로켓에 대한 에피소드 였다. 러시아측에 목적을 전하였으나, 중간에 전달이 제대로 안되어 러시아측에서는 미국이 러시아를 향한 핵무기를 발사한 것으로 판단, 당시의 옐친 대통령에서 몇 분안에 대응 공격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갔었다는 사실이였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옐친은 대응공격판단을 유보했고, 덕분에 핵무기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모르던 사실이였다.

다큐멘터리로서 마지막에 제시하는 해결방안은 사실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핵무기 수=0로 만들자는 것
그리고 핵무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방사능물질들을 국제연료은행에서 총괄하여 중간에 사라지는 것이 없도록 철저히 관리하자는 것이다.
가능할지는 몰라도, 시도가 필요함을 잘 설득하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 영화이나, 폭발장면들의 편집에 전혀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관람할 수 있다.

2017/02/18

문득 드는, 나 자신을 위한 생각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내가 한 어제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느라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하느니.

지금 내가 하는 일, 내일 내가 하고 싶은 일, 그리고 모레 되고 싶은 나를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얼마나 경제적인가.

2017/02/17

한 달 만에 또 방문. 마우나케아

지난 달의 방문 이후, 또 다른 관측시간을 얻었다.
이번에는 9일간의 연속관측인데, 사실 9일의 시간을 신청하면서도 정말 받을 줄은 몰랐었다.
함께 관측프로포절을 작성하던 경험있는 동료들이 9일같이 장기간을 쓰면 선택안될 확률이 높다며 만류를 했기에 결국 관측프로포절에는 최소 5일, 최적 9일로 정정해서 프로포절을 썼었던 것.

다행히 운이 좋았고, 관측시간을 얻었다.
그리고 4,100m의 고도를 매일 다니며, ... 마우나케아 정상의 날씨가 얼마나 다양한지 깨닳았다.
160 km/h 속도의 강풍에 대피를 하기도 하고
구름이 산정상에 운집하면서 100% 습도에 100 km/h의 강풍에 길이 얼을 것 같아 대피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 계속 날씨가 나쁜 것은 아니였기에 3일간은 매우 관측에 좋은 날씨였고, 다른 3일은 구름이 끼었어도 관측은 가능한 날씨였다.
여러차례 매일 반복을 하다보니, 지상 관측에 대해 참 많이 배우게 된 두 달이 되었구나!

<산 정상의 관측소에서 산 중턱의 숙소로 가는 길>



<산 중턱의 숙소>



<강풍과 100%습도의 결과>



<강풍과 100%습도의 결과>



<강풍과 100%습도의 결과>



<산정상 부근의 연못.
망원경 조종엔지니어인 Greg과 이번 관측기간동안 친해져서, 같이 가봤다.>



<산정상에서 보이는 이웃 섬>



<마우나케아산의 그림자. 해질녁, 동쪽을 보면 볼 수 있다.
이를 알려준 Greg (망원경 조종엔지니어)에게 감사!>



<관측을 진행한 IRTF. 바로 옆의 산턱에서 바라본 모습>







<숙소에서. 저멀리 화산에서 뿜어지는 불빛이 밤하늘의 별과 어우려저서 멋졌다>

2017/01/27

마우나케아 관측 Mauna Kea observation

위성자료만 사용하던 내가 지상 망원경 관측을 하게 될 줄은.. 사실 2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 였다.
관심은 있었어도 위성자료로 바쁘고, 한편으로는 해본 적이 없기에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는 막연한 벽이 존재했기 때문이였다.

그렇지만 관심은 있었기에 지상관측을 하는 동료에게 가끔 넌지시 '이런건 어때?'라며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느날 그 동료가 '그럼 네가 이번 관측 프로포절 써볼래? 내가 도와줄께'라는 것이 아닌가! (사실,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였다. 누가 이런 귀찮은 일을 담당하고 싶겠는가! 사실 당시 그 동료는, 난 너무 바빠서 쓸 수가 없으니, 누군가 써줬으면 좋겠어라는 것도 넌지시 의중을 비추었었다.)
와!
나는 기회다 싶어서 바로 '응응! 내가 쓸께. 도와만 줘!'라고 했지.
그리고 그 뒤에 처음 써보는 지산관측 프로프절에 2-3주를 보냈다.
(하필 프로포절 마감일이 내 생일이라, 생일날 나는 마지막 확인과 두근거리는 마음에 계속 일해야 했다만)

몇 개월 뒤, 관측허가가 났다는 소식에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번 달 4145m 고도의 마우나케아(하와이의 가장 높은 산)의 3m 망원경을 쓰러 다녀왔다.
적외선 망원경으로는 지상 망원경들 중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망원경인 IRTF를 쓰러!
 
<관측 연구자들이 머무는 약 2600m 고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 (낮)>


<관측 연구자들이 머무는 약 2600m 고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 (해질녁)>


<관측 연구자들이 머무는 약 2600m 고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 (밤).
저 별들이 보이는지?>


<관측 연구자들이 머무는 약 2600m 고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 (밤하늘)
내가 가진 카메라로는 처음으로 별 사진을 찍었다.
오리온의 삼태성과 자그마한 오리온대성운이 사진 중앙즈음 위치해 있다.
이런 사진이 그냥 찍히는 곳이라니!
다음에 올 때는 광각렌즈를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

마우나케아에서 가장 날씨가 안좋다는 1월이였건만,
6일의 관측 기간 내내 날씨는 청청 맑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의 도움이 아닐지.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관측을 무사히 마친 것은 팀웍 덕분이였다.

지금껏 연구인생 모두 혼자 일하는 것이였는데,
지상관측은 사람대 사람으로 일하는 것이였다.
처음 관측을 하기에 기존의 경험자들의 이야기들을 들어서 관측 계획을 짜야했고,
처음 기기를 다루기에 관측소의 천문학자의 기기 다루기 수업을 들어야했고, 각종 버튼들을 숙지해야했다.
그리고 동료들은 내가 잊는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조언을 해줬고 관측기록을 남겨주었다.
대형 망원경을 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기에 나는 재차 이런저런 요구를 했고, 그는 내가 말한대로 망원경을 조정해줬다.
뭔가 내가 원하는 대로 관측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찌나 스릴감 넘치던지. '관측'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캬....
이렇게 관측을 하면서 알게된 것은 전반적인 '팀플레이'다. 그리고 관측을 해본적도 없고, 기존에 참여해 본 적도 없는 내가 한 관측을 리드하다보니 어찌나 신경이 많이 쓰이던지....!
얻은 자료에 대해 내가 주인이라는 것도 신기하고 기쁘기도 한데,관측을 도운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논문으로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도 들게 된다.
인생, 정말 배움의 연속이구나.

<마우나케아 정상. 4145m 고도. Keck 관측소. 내가 관측한 곳의 바로 옆에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10m 망원경이다>


<내가 관측을 진행한 IRTF>


<마주보이던 영국의 3.8m 망원경, UKIRT.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적외선 망원경.>


<해면고도에서 보이는 산 정상 풍경>


<해면고도에서 보이는 전체 마우나케아 모습.
눈쌓인 산정상과 대조적으로 해면고도는 여름이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있던 나의 첫 관측은 어제 무사히 마감했다.

그리고 다음의 관측 프로포절이 허가가 낫기에 2월에는 9일의 금성관측을 하러 떠난다!

대전 생활 1년

14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2022년 6월부터 대전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대전에 도착한 한 달 동안은 마치 한국어를 사용하는 어떤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였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벌써 1.5년이 지났다. 아직도 나는 대전이 낯설다. 이 낯설음에 ...